내추럴 시티 (세계관, 사랑과희생, 재평가)
기계가 사람보다 더 인간다울 수 있을까요. 2003년에 개봉한 한국 SF 영화 『내추럴 시티』는 바로 그 질문을 78억 원짜리 세계관 안에 담아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한 액션 오락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끝나고 나서 한참 여운이 남더군요.
세계관: 황폐하지만 아름다운 2079년
『내추럴 시티』의 배경은 2079년, 인간과 사이보그(cyborg)가 공존하는 미래 도시입니다. 사이보그란 생물학적 신체에 기계 장치를 결합한 존재를 뜻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신체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전투형 존재로 그려집니다. 총알을 피하고, 전투기로 뛰어들고, 혼자서 수십 명의 군대를 상대하는 장면들은 당시 한국 영화 기준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연출이었습니다.
세계관 자체도 단순히 미래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대전쟁이 지나간 후 도시는 완전히 무너졌고, 여신상 하나가 파괴된 뒤로는 꽃조차 피지 않는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황폐한 도시 위에 네온사인이 빛나고, 폐허가 된 건물 옥상에는 누군가 홀로 화단을 가꾸는 장면이 나오죠. 제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것도 바로 그 장면입니다. 멸망 직전의 세계에서도 꽃을 심는 사람. 그 이미지 하나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계관 구축 방식은 당시 할리우드 SF 영화들이 보여주던 스케일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예산의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과 세트 디자인, 어두운 색감의 영상미는 지금 다시 봐도 독창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등록된 작품 정보를 보면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대작 프로젝트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이보그들을 탑승시켜 다른 행성으로 보내는 우주선, '망각의 행성'이라 불리는 꼬요섬 시뮬레이션 같은 설정들도 단순한 배경 장치가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사이보그는 언제가 됐든 버려지는 존재이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리아의 모습이 더 비극적으로 다가왔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랑과 희생: 알과 리아, 그리고 시온
이 영화의 중심에는 세 명이 있습니다. MP(Military Police, 군사경찰) 부대원이었던 알, 수명이 3일밖에 남지 않은 사이보그 리아,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이야기에 끌려들어오는 여자 시온. 알은 리아를 살리기 위해 닥터 지로라는 인물을 찾아가고, 그로부터 시온의 DNA(Deoxyribonucleic acid, 생물의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분자 구조)가 리아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봤을 때 알이라는 캐릭터가 꽤 복잡하게 느껴졌습니다. 냉철한 전직 특수부대원이 사이보그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도 그렇지만, 리아를 살리기 위해 민간인인 시온을 반강제로 납치하는 장면에서는 그를 단순히 응원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럼에도 그 선택이 이해가 됐다는 점이 이 영화의 아이러니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캐릭터 대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 리아: 사이보그이지만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 수명이 다해가는 상황에서도 춤을 추며 마지막을 버팁니다.
- 닥터 지로: 인간이지만 영생을 위해 타인의 DNA를 착취하려 한 인물. 나중에 밝혀지지만 사이보그 사이퍼의 몸속에 기생하며 살아온 존재입니다.
- 시온: 이야기의 열쇠를 쥔 인물이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다닙니다.
닥터 지로와 사이퍼가 동일인물이라는 반전은 후반부에 나옵니다. AI(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가 파손되지 않는 한 절대 죽지 않는 전투형 사이보그가 사실은 영생을 탐한 인간의 의식이 깃든 존재였다는 설정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뒤집어보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기계 안에 인간이, 인간의 외형 안에 기계가. 경계가 계속 흐려지는 세계. 이 부분이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가장 철학적으로 밀도가 높은 지점이었습니다.
리아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내내 쌓아온 감정이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입니다. 알이 시온을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온 직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끝을 선택하는 리아. 화려한 액션으로 시작된 영화가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끝납니다. 오래 기억에 남는 결말이었습니다.
재평가: 2003년의 도전은 지금 어떻게 읽히는가
『내추럴 시티』는 개봉 당시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78억이라는 제작비에 비해 관객 수는 기대에 못 미쳤고, 일부 평단에서는 스토리 전개의 복잡함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보면서 특정 부분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이퍼와 닥터 지로의 연관 관계, DNA 엘분자(분자생물학적 설정으로 영화 내에서 리아와 시온을 연결하는 핵심 유전 단위)의 원리, 그리고 영생의 메커니즘이 후반부에 한꺼번에 설명되면서 앞부분에서 흘려보낸 단서들을 다시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맥락을 함께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2003년 한국에서 대규모 SF 영화 자체가 극히 드물었고, 사이보그 설정과 디스토피아(dystopia, 모든 것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암울한 미래 사회)적 세계관을 진지하게 다룬 작품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자료에서도 확인되듯, 당시 한국 영화 산업은 장르 다양화의 초기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런 시점에 이 정도 규모의 SF를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반면 캐릭터 감정선이 좀 더 촘촘하게 다뤄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습니다. 시온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다소 빠르게 처리된 느낌이었고, MP 기동대장 노마처럼 설정은 흥미로운데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캐릭터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이런 부분이 아쉽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여백 때문에 각 캐릭터에 대해 더 궁금증이 생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의 한국 SF 콘텐츠가 OTT와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기까지 어딘가에 이런 시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추럴 시티』는 그 밑바닥에 있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완성도가 고른 영화는 아닐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질문을 던진 방식은 지금 다시 봐도 유효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가장 오래 남은 건 액션이 아니라 리아가 혼자 무대 위에서 힘겹게 춤을 추는 장면이었습니다. 만약 한국 SF 영화의 계보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사랑과 존재에 대한 물음을 담은 영화를 찾고 있다면, 『내추럴 시티』는 한 번쯤 직접 확인해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zVoAnusw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