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의 오디세이 (아이맥스, 트라우마,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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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맥스 상영관 자리를 예매하면서 솔직히 살짝 겁이 났습니다. 3시간짜리 신화 영화라니, 중간에 지루해지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첫 장면이 시작되자마자 그 걱정은 바다 위로 증발해 버렸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디세이>는 단순히 고대 서사시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 아닙니다. 전쟁 이후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죄책감과 귀향의 의미를 정면으로 파고드는 영화였습니다.
아이맥스로 봐야 하는 이유
영화관에 들어서면서 제가 먼저 느낀 건 소리였습니다. 개봉 전부터 아이맥스 70mm 포맷으로 제작됐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실제로 앉아서 경험해 보니 그 차이가 확연했습니다. 아이맥스(IMAX)란 일반 극장보다 훨씬 큰 화면 비율과 높은 해상도를 구현하는 대형 상영 시스템으로, 특히 광활한 자연이나 전쟁 장면을 담을 때 압도감이 배가됩니다.
오디세우스가 탄 배가 폭풍우 속에서 산산조각 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파도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기울었습니다. 일반 상영관에서 봤다면 그냥 '멋진 CG 장면'으로 넘어갔을 텐데, 아이맥스 화면에서는 그 파도가 실제로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놀란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특히 주목받는 건 시각효과에만 기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이맥스 공식 페이지에서도 설명하듯이, 아이맥스 포맷은 촬영 단계부터 특수 카메라를 사용해 훨씬 넓은 시야각과 선명도를 담아냅니다. 놀란은 실제 바다와 거대한 세트장을 적극 활용해 화면에 진짜 질감을 불어넣었고, 그 덕분에 오디세우스의 바다는 살아 숨 쉬는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바다가 단순한 배경으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이 제 눈에는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먹구름과 거친 파도, 끝없는 수평선이 오디세우스의 불안한 내면과 겹쳐 보이는 순간들이 반복됩니다. 연출이 감정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화면 자체가 그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화려한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지하세계에서 죽은 전우들과 재회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거짓말 때문에 죽었소." 이 한마디가 나오는 순간, 극장 안이 정말로 조용해졌습니다. 그 짧은 대사 하나가 오디세우스가 짊어진 죄책감의 무게를 단번에 전달했습니다.
놀란은 이 작품에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PTSD란 전쟁이나 사고처럼 극도로 충격적인 경험 이후에 지속적으로 그 기억에 시달리며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전사가 평범한 삶으로 복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영화는 그 당연한 명제를 스크린 위에서 서사적으로 증명합니다.
키클롭스 장면은 그 맥락에서 이해해야 제대로 소름이 돋습니다. 시각효과로 구현된 이 외눈박이 거인은 인간을 잡아먹으면서도 인간의 존재 자체를 거의 인식하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대사처럼, 우리가 개미와 굳이 대화하려 하지 않듯이요. 공포가 크리처(creature, 괴물 형태의 존재)의 흉측한 외모에서 오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데서 온다는 설정이 정말 영리했습니다. 제가 직접 앉아서 경험해 봤는데, 그 장면에서 팔걸이를 무의식적으로 꽉 쥐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아쉬움도 생깁니다. 원작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지혜롭고 교활한 트릭스터(trickster, 꾀와 속임수로 문제를 해결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맷 데이먼의 오디세우스는 지나치게 묵직하고 진지합니다. 장난기 넘치는 특유의 재치는 많이 희석됐고, 덕분에 캐릭터가 가진 입체성이 다소 평면적으로 보였습니다. 연기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캐릭터를 설계한 방향의 문제였다고 봅니다.
귀향이라는 화두
영화를 보면서 저는 계속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과연 무엇인가. 오디세우스는 20년 가까이 이타카(ithaca, 오디세우스의 고향인 섬)를 떠나 있었습니다.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아내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와 어느덧 성인이 된 아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지리적인 귀환보다 심리적인 복귀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묻습니다.
앤 해서웨이의 연기는 솔직히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습니다. 돌아올지조차 불분명한 남편을 기다리며 묵묵히 베를 짜고, 집안을 헤집어 놓은 구혼자들에게 냉정하게 맞서는 장면들은 화려한 전투 시퀀스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반면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안티노오스를 비롯한 구혼자들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원작에는 그들 나름의 배경이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강제로 끌고 간 전쟁에서 아버지와 형들을 잃은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 복잡한 맥락이 살아 있었다면 선악 구도가 훨씬 입체적으로 작동했을 텐데, 영화에서는 그냥 응징받아야 할 악당으로 소비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말하는 귀향의 주제는 유효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PTSD 관련 자료에서도 언급하듯, 전쟁을 경험한 이들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이동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놀란은 그 사실을 3,000년 전 신화를 통해 다시 한번 꺼내 보여줍니다.
영화가 아쉬운 점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텔레마코스의 성장 서사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 후반부 활약이 다소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 구혼자들의 입체적인 동기가 거의 생략돼 선악 구도가 단순해졌습니다.
- 3시간 분량임에도 일부 감정선이 성급하게 봉합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 제우스의 율법 쇠퇴라는 설정이 반복 언급되지만 서사에 충분히 녹아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나오는 길에 바다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이건 분명 잘 만든 영화만이 남기는 여운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무결점의 걸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트라우마,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이만큼 묵직하게 던지는 블록버스터는 드뭅니다. 아이맥스 상영관이 남아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가십시오. 화면이 커야 제대로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보고 난 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게 된다면, 그건 영화가 제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 참고: https://kr.ign.com/the-odyssey-2026/15323/odisei-ribyu- 공유 링크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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